어느 방송 PD가 쓴 글.

 

 

-

 

 

연애를 시작하면 한 여자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
그녀가 좋아하는 식당과 먹어본 적 없는 이국적인 요리. 처음듣는 유럽의 어느 여가수나 선댄스의 영화. 그런걸 나는 알게된다. 그녀는 달리기 거리를 재 주는 새로 나온 앱이나 히키코모리 고교생에 관한 만화책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는 화분을 기를지도 모르고, 간단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 먹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았거나 혹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의외로 송어를 낚는 법을 알고 있을수도 있다. 대학때 롯데리아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까닭에 프렌치후라이를 어떻게 튀기는지 알고 있을수도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있다. 그녀의 직장에, 학교에는 내가 모르는 동료와 친구들이 있다. 나라면 만날 수 없었을, 혹은 애초 서로 관심이 없었을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근황과 인상, 이상한 점을 건너서 전해듣거나, 이따금은 어색하나마 유쾌한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아픈 데가 있을수도 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 특정한 부분에 콤플렉스가 있을수도 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부모님과 갈등을 겪고 있을수도 있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형태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심각한 방식으로 사람을 위협한다.

그녀의 믿음 속에서 삶이란 그냥 잠시 지속되었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의 빛 같은 것일 수도, 혹은 신의 시험이자 선물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는것이 삶 자체라고, 그녀는 피로에 지쳐 있을 수도 있다.

요컨대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협하기 때문에 세상의 아주 일부분 밖에는 볼수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종교적 신념을 동시에 믿거나, 일곱 가지 장르의 음악에 동시에 매혹될 수 없는 것이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건 온전한 세계의 반쪽. 에 가깝다. 그건 너무 커다랗고 완결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오는 세상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실연은 그래서 그 세상 하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이 사라진 마음의 풍경은 그래서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밀물이 남기고 거대한 빈공간에는 조개껍질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나는 혼자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하고, 선댄스의 감독이 마침내 헐리웃에서 장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이따금 발견하고 주워 들여다보는 것은 다분히 실없지만, 아름다운 짓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러한 실연이 없는 관계-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면 그 모든 절반의 세계는 점차 단단히 나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기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의 리스트에는 그녀가 가져온 좋은것과 문제점 모두가 포함된다. 그건 혜택과 책임으로 복잡하게 얽힌 대차대조표라서 어차피 득실을 따지기가 어렵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가 최초에 나에게 가져왔던 섬세한 풍경들의 윤곽, 디테일한 소품들은 생활이라는 것에 차차 -혹독히- 침식되겠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와 몹시 다르고, 다양해서- 이따금 경이로울 것이다.

한 사람이 오는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왜 아침에 그 문구가 생각났을까.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단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러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데까지는 가야 하는 것

자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목련 후기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저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겨울 숲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 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하늘의 천

 

                      예이츠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 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지금껏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서서히

젖을 새도 없이 젖어

 

세상 한 귀퉁이 한 뼘

처마에 쭈그려 앉아

 

물먹은 성냥에

우울한 불을 댕기며

 

네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

 

- 폭우, 이창훈




추억에 못을 박는다
/ 이정하


잘 가라, 내 사랑
너를 만날 때부터 나는
네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저문 해가 다시 뜨기까지의
그 침울했던 시간,
그 동안에 나는 못질을 한다.
다시는 생각나지 않도록 서둘러
내 가슴에
큰 못 하나를 박았다.

잘 가라, 내 사랑
나는 너를 보내고 햄버거를 먹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뒤돌아 서서
햄버거를 먹다가
목이 막혀 콜라를 마셨다.

잘 가라, 내 사랑
네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버린 게지.
네가 가고 없을 때 나는 나를 버렸다.
너와 함께 가고 있을 나를 버렸다.

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소실

 

 

 

황인찬

 

 

 

 

해변에 가득한 여름과 거리에 가득한 여름과 현관에 가득한 여름과 숲속에 가득한 여름과 교정에 가득한 여름 물 위에 앉은 여름과 테이블 맞은편의 여름과 나무에 매달린 여름과 손 내밀어 잡히는 여름 잡히지 않는 여름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선풍기는 돌아간다 등이 젖은 남자애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뽑는 이가 있다 창가에 걸어놓은 교복은 빠르게 말라 가고

 

또 보다 많은 것들이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손을 언제 놓아야 할까

그 생각만 하면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