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의 신작 [종의 기원]을 읽었다.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인데 촘촘하게 엮은 날줄과 씨줄 덕분인지 전혀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뭘 이렇게까지 했지, 싶을 정도로 빡빡하게 써댔다.

내 소설 만만하게 보지 마, 온 힘을 다 해 썼다고. (-> 이런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두 번 펼쳐 볼 책은 아니어서, 구입해서 읽고 바로 되팔아버렸다.

흡입력은 좋으나 정신적인 피로를 너무 몰고와서..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인건지, 아니면 내용에 질려버려서 두 번은 안 펴보고 싶은 건지. 둘 다 겠지?

 

 

요새 엄청 핫한 한강 작가를 비교해서 얘기하자면 

한강 작가는 연포탕처럼 심플하고 맑으면서도 도톰한 맛을 내는 글을 쓴다면

정유정 작가는 MSG를 잔뜩 쳤는데 맛있어서 눈 감고 먹게 되는 제육볶음 같은 글을 쓴다.

정신병자, 돌림병, 살인, 복수, 게다가 이번엔.. (스포니까 생략) 

 

대중적인 헐리웃 싸이코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볼만 하고

그런 코드가 안맞는다면 so so.

 

 

 

 

 

 

 

 

언제나 생각하지만 집에는 책이 너무 많고, 막상 시간 내서 읽으려면 손이 선뜻 가는 책이 없고

 

 

갖다 팔 책들을 정리하다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사놓고 아직 읽지 않았다는게 생각나서 책상에 올려뒀다

 

 

두께가 어마무시해서

스웨덴 이름 외우는게 머리 아파서

대개 추리소설이 그렇듯 스토리의 퍼즐을 맞추는게 귀찮아서

며칠을 미루다가 어제 작정하고 읽었다

 

 

재미는 있고, 재미는 있고, 재미는 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중에 나온 추리소설은 거진 다 섭렵할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흥미가 뚝뚝 떨어진다

 

 

새벽 두시 반까지 읽었으니 영 지루한 내용은 아닌데

그냥 좀, 뭐랄까. 모조리 때려부수는 b급 영화 보고 나와서 찝찝한 기분

 

 

이제 이런 책은 안 맞나보다

소녀의 죽음인가 뭐시기인가도 아직 안읽었는데.. 그건 그냥 안읽고 팔까 생각중

읽기엔 시간이 아깝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써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중에서










P.35
젊어서 결혼을 하고 나서는(결혼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음식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타인과 어울리는 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몸소 배웠다. 그 결과 다소 일그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나, 사회성 같은 것도 서서히 몸에 익혀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20대의 10년 동안 나의 세계관은 적지 않게 변화했고, 인간적으로 얼마간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온갖 경쟁과 다툼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면서, 살아남기 위한 실전적인 요령 같은 것을 터득해왔던 것이다. 이 10년간의 그 나름대로 힘든 생활 체험이 없었다면, 소설 같은 걸 쓰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고, 또 쓰려고 생각해도 틀림없이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그다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P. 65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친구나 선생들은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여러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 그건 이 세계에선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선생은 평가를 해야 하고 동료들도 당신 작품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새로운 예술을 알아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마음껏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여기, 이 게토에 갇혀 있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신나게 붓을 휘두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따라서 주변 모든 예술가의 어떤 새롭고 참신한 시도에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냉혹하다. 우리, 두꺼운 껍데기로 방어막을 둘러친 얼치기 애늙은이 평론가들은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노리고 있다. 사자가 어린 치타 새끼를 물어죽이듯, 그것은 그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동료들에게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일단 여기 들어온 이상,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겹겹의 방어막으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 끝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지 않도록 잘 아끼고 보호하여, 학교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배움은 다음 문제다.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타인의 재능을 샘내지 말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훗날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 양분으로 삼고 그 어린 예술가의 벗으로 키우라.

나는 이 소설이
단편집인줄 미처 몰랐네.
그저 작가가 필력이 좋은 유명한 사람이라 책으로 읽고 싶었을 뿐이고
언니가 책을 사준다고 했을 뿐이고
브래드 피트와 이름 모를, 그러나 유명한 여자 배우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가 곧 개봉할 예정이고
의외로 호평을 받아 볼만한 영화에 올랐다고 하기에 궁금했을 뿐이고


책을 받아보니
약간 재생지 같은 가벼운 질감에 두툼한 것이 마음에 들었고
활자체나 글간격도 거슬리는게 없었고
그래서 저녁시간에 쭉쭉 읽어내려가보자 생각했는데


어라
내용이 막 나가는거라.
제목에 이미 스포가 되어있듯이
벤자민 버튼이 노인으로 태어나서 점점 어려진다는게 포인트인데
심리적 갈등내용 없이 진도가 쭉쭉 나가네.
그러더니 뚝 끊기네.
단편 끝났네.


ㅡ,.ㅡ


내가 이런 이야기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때는 어느 정도의 기대치가 있는 법이라고요~
장편인줄 알고 읽었는데 단편으로 뚝 끊기면
독자가 얼마나 놀라는지 아시는가.
아무리 잘쓴 이야기라도 '이게 끝이니''진짜 이게 다니' 하게 된다고요.


그래도 그 당혹스러움을 배제하고 본다면 글 자체는 재밌었다.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글만, 게다가 때로는 이해 안되는 난해한 소설들에
밑줄 긋고 뜻을 파악하며
마치 중고딩때 국어 시간에 글 배우듯이 공부하는데
가끔은 이런 소설처럼
그 의미 파악이나 문장의 아름다움보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로서의 글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글을 공부하는 것처럼 읽을 수는 없지 않나.
천운영의 바늘을 읽고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을듯한 내용에 짜증났던 것처럼.




'성서와 비견되는 소설'이라니, 얼마나 건방진 홍보문구인가.
내가 비록 기독교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성서의 진실성에 확신조차 없지만
성서에 담겨있는 내용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은 안다.


이 건방진 소설, 로드.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될 때는
출판사의 홍보 전략이 치밀한 경우가 많다.
사람을 자극하는 홍보 문구는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지 읽어나 보자'는 생각 또한 들게 만들었다.



+



'로드'는
지구에 대재앙이 일어난 후 재만 남은 황량한 곳에서
살아남은 부자가
바다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적인 세상은
암담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인간사냥꾼을 피해다녀야 하는 날들, 굶주림의 극한까지 내려가는 삶은
삶을 지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남자는 대재앙 속에서 태어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아는
어린 아들을 희망삼아 삶을 지속해간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책 속의 부자가 처한 상황은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어야 했던 절망과 희망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가족과 이웃들이 죽어가고 그것이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모를 불안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들의 경험과 삶에의 끈질긴 끈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인내.


성서와 비교할 가치를 찾지 못했고
결말이 확 와닿는 것도 아니고
책 '눈 먼 자들의 도시'나 만화 '세븐시즈'를 봐서인지
그들의 극한 상황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읽기는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의 희망, 그것이 사람을 살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나베 세이코/여성신문사


이 책을 읽으면 크게 세 가지에 당황한다.
발간된 지 이십 년 된 책이라는 점.
저자가 할머니라는 점.
책의 주인공이 할머니라는 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저자는.... 할머니였다...
그 아찔한 감수성은.. 쭈그렁 할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감성이었다..


이 편견에 가득찬 눈빛을 거두고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주인공이 77세 할머니라고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할머니이기 전에 여자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다.


*


나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
내가 할 의무들을 다 해치우고
가볍게 우아하게
내 욕구 내 의사 모두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주장대로 편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늙고 싶다.


*


죽어도 좋아, 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통해 노인의 욕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이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 Recent posts